권전
“형. 이거 봐.” 데뷔 오 년 차에 체조경기장 입성이면 좀 늦은 편이지. 미리보기로 확인한 메시지는 잠금화면에서 쓱 사라졌다. 마음 좀 곱게 쓰라니까.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. 원우는 안읽씹으로 답장을 마친 후 수민에게 고개를 돌렸다. <응, 뭐?> 게이밍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던 수민이 핸드폰을 딱 내밀었다. 가로 화면을 가득 채운 경기장이 보였다....
빛 없는 오르막길에 걸린 플래카드가 휘청거리고 있었다. 새카만 글자는 듬성듬성 읽혔다. 전국체전, 일그러진 채로 출렁거리던 단어 또한 곧 검게 사라졌다. 원우는 가만히 서서 에러 창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는 글자들을 읽었다. 걸린 지 한 달도 더 된 현수막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. 수십 번 더 지나쳤을 텐데 새삼스럽게도. 아침 운동장의 소유권을 차지하기란...
사람 앞에 두고 핸드폰 하는 거 그거 진짜 버릇없는 거다. 지 감자튀김 다 처먹어놓고 원우의 감자튀김을 하나씩 가져가던 상연이 대놓고 힐난했다. 그러거나 말거나 원우는 식사에 진작 흥미를 잃고 나이트 시프트 모드 켠 액정만 뚫어져라 쳐다봤다. 입학 이래 처음으로 봄 축제와 관련된 정보를 싹 다 모으고 있는데, 마땅히 쓸 만한 게 없었다. 원우가 원하는 건...
어떤 의미에서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. 흔치 않은 경험이 닥칠 때 그런 생각을 한다. “강민아.” 운명은 믿지 않는다. 인연도 떨떠름하다. 예상치 못한 재회는 늘 불편했고, 계획된 만남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. 우연, 인연, 운명. 매체가 시청률을 위해 표방하는 상투적 단어들이 줄지어 떠올랐다.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운명이 된다는, 로맨틱한...
새하얀 스웨터를 마지막으로 올려 꾹 내리누른 박스가 터졌다. 무게를 견디지 못한 테이프는 탄산 같은 소릴 내며 찢어졌고, 군데군데 뜯긴 틈으로 굵은 보풀이 보였다. 한 겨울에나 입을 법한 두꺼운 스웨터의 실이 테이프 곳곳에 눈송이처럼 붙어 있었다. 이럴까 봐 몇 번 더 테이핑 하려고 했던 건데. 먼발치 바닥에서 주워 온 박스테이프를 손에 쥔 원우가 허망한...
“역할 분담하자고 하셨죠?” 노트북에 들어온 빨간 불을 끈질기게 노려봤다. 보기 싫어 꺼버린다면 배터리가 나갈 것이고, 이대로 놔둔다면 과열될 것이다. 방전과 오버히트. 어느 쪽도 내키지 않는 듯 좁혀진 미간을 향해 핑 질문이 날아와 꽂혔다. 개강 이래 제대로 발 뻗고 잠든 적이 없었다. 전원우는 붉게 충혈된 두 눈 그리고 직선처럼 쭉 뻗은 시선을...
사라지는 기억은 없다. 찾지 못할 뿐이다. 심해 저편. 태양 가까이. 혹은, 영원한 시간 안에서. 아카야 공연 전날, 주역 무용수가 교체됐다.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. 팔월, 도쿄도 도시마구 니시이케부쿠로에 위치한 도쿄예술극장은 대한현대무용단의 현대무용극 <아이온>을 선보인다.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가기 전부터 전체 회차 매진이라는 폭발적인 관심을 받은...
도망간 목소리가 두고 간 고백. 직선으로 헤엄쳐 온 또렷한 애정들이 온몸에 철썩 달라붙어있었다. 까딱하면 이미 넘어진 곳을 또 무너뜨릴 정도로. 순정이 붙은 멜로디는 무서웠다. 쉽게 입에 붙었으나 잘 잊히지는 않았다. 사랑 노래는 숨이 찼다. 괜히 강렬한 연애 시의 청자가 된 것 같아 식은땀이 났으니까. 매끄러운 바닥을 간신히 짚은 손바닥과 납작 들러붙은...
靑春原罪